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베리아 내전 (문단 편집) ===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봉기 === 이런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육군에 속해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협상국]]측에게 많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소속의 [[체코인]][* 16세기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가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넘어간 이래 체코인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슬로바키아인]][* 슬로바키아는 헝가리 왕국 성립 이래 1000년간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 이후에도 [[헝가리 왕국]]에 속해있었다.] [[장병]]들이 포로로 잡혔는데, 체코인 정치가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와 슬로바키아인 정치가 밀란 라스치슬라프 슈체파니크등의 노력으로 포로로 잡힌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으로 구성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러시아 등지에서 창설되었다. 특히 러시아에서 창설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규모가 제일 컸으며 심지어 여기에는 이전에 러시아에 거주하던 체코인들도 가담했다. 그 병력은 5만에 이르렀고 1개 군단을 창설해 [[키이우|키예프]] 부근에 모였다. 그러다가 1918년 2월 [[블라디미르 레닌]] 정부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 조약]]을 맺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러시아에서는 더 이상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전투를 할 수가 없게 됐다. 그러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파리에 있던 체코 임시 정부로 이동한 뒤 독일군과 싸우려고 했다. 3월 프랑스 정부가 주선해서 러시아 정부에게 승인받았다. 하지만 독일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서 동유럽 일대를 장악한 탓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어쩔 수 없이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 지역을 경유해서 서유럽으로 이동하는 루트를 선택하였고 이에 따라서 1918년 4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키예프에서 출발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부대를 60여개 정도로 나누고 [[시베리아 철도]] 열차를 이용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송 인프라의 열악함으로 인하여 원래는 5월 중순까지 도착 예정이었지만 결국 6월 초순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사람의 수는 1만 4천명뿐이었다. 그 결과 1918년 5월 당시 5만여 병력은 팬자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시베리아 철도]] 선로를 따라 쭉 늘어선 형태가 됐고 주로 [[옴스크]]와 [[첼랴빈스크]]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수송이 어려우니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했는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여기에 반대하며 볼가 강 중류와 시베리에 수용소에서 봉기했다. 이들은 철도 주변 일정 지역을 점령한 뒤 자신들을 연합국의 일원이라고 말하면서 [[장갑열차]] 등을 사용하여 독일과 정전 협정을 맺은 소비에트 붉은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6월 4일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 외교 대표들은 성명을 발표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연합군의 일원이며 연합군이 지키고 있다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러시아 육군 소속 체코인들도 7월 1일에 유럽으로 호송될 예정이였으나 동료들의 봉기 소식을 듣고, 6월 29일 봉기를 일으켜서 블라디보스토크 소비에트를 무너트렸다.[*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31 ~ 36] 한편 미국은 원래 일본 제국의 영토 확장 야심 때문에 일본 제국군의 간섭을 경계했다. 그런데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이 봉기하자 미국은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여 7월 8일 미국은 일본에게 함께 출병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일본은 내각 회의를 소집한 뒤 미국의 제안에 찬성하고 8월 2일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하고 8월 3일에 [[시베리아]] 전쟁 참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일본군은 미군이 들어오기 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병력 약 2만 8천명을 배치했다. 미군은 8월 16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영국은 8월 3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증원군을 상륙시켰다. 이후 캐나다군 6000명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8월 10일에는 프랑스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원래 일본은 미국과 협정을 맺어 각각 1만 2천명을 파병하기로 했다. 다른 국가의 군대들은 이보다도 적게 파병했다. 그런데 일본은 협정을 맺은 규모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일본은 잇따라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군대를 보냈다. 일본 제국이 시베리아와 연해주로 보낸 병력의 수는 무려 약 6만 ~ 7만명 정도였다. 시베리아 내전에 간섭한 외국군의 대부분이 일본 제국군이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파견 부대가 바뀌었으나 지휘 계통은 변하지 않았고 병력수는 대체로 6만 ~ 8만명선을 유지했다. 시베리아 전쟁에서 가장 오랫동안 파견하고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한 외국군은 일본군이였다.[*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36쪽 ~ 41쪽] 시베리아 백군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볼셰비키를 몰아내고 백군 정부를 수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